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머스 홉스 (문단 편집) == 생애 == [[엘리자베스 1세]] 때,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상륙을 시도하려한 1588년에 출생했다. 당시 그의 모친은 임신 7개월 중이었는데 무적함대가 마을 근방까지 올지 모른다는 소문에 놀라 조산하고 말았다.[* 홉스는 이 얘기를 종종 하면서, 자신은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을 즐겼다.] 이른바 [[칠삭둥이]]. 운좋게 목숨은 구했지만 불량 목사였던 아버지[* 아버지 이름도 '토머스 홉스' 였다. 똑같은 이름을 차남(토머스 홉스)에게 물려준 것.]가 주먹다짐 끝에 소속 전도구에서 쫓겨나게 되어 가족을 버렸고 편모가정으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부유한 삼촌[* 삼촌 프랜시스는 성공한 장갑 상인이었다.]의 후원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했다.[* 학사 학위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컬리지에서 딴다.] 이후 교장의 추천으로 캐번디시 가문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인생이 피게 된다. 거기서 평생 후원자인 윌리엄 캐번디시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장서와 여러 고위층 문객들을 직간접으로 접하면서 깊은 학문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대법관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서로 일하게 된 것으로, 이때 경험론적 학풍에 영향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살 차이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윌리엄 캐번디시와 유럽 여행을 갔으며, 윌리엄 캐번디시가 죽고 난 후에는 다시 그의 아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이 때 말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기도 했다. 한편 그 여행 와중에 [[르네 데카르트]], 피에르 가상디 등의 인물들과도 만나 교류했다. 특히 데카르트와는 학문 접근 방식과 철학과 광학이론 등을 가지고 견해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벌였다. 데카르트의 저서 『성찰』에 홉스의 비평문이 같이 실렸을 정도다. 홉스는 데카르트를 "[[기하학]]만 했으면 위대한 수학자가 될 것을..."이라고 깠지만, 데카르트는 당시 무명에 불과했던 홉스를 그냥 무시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3대 작도 불능 문제|원적 문제]]를 증명했다면서 수학자 존 윌리스[* 존 월리스는 뉴턴 직전 [[미적분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무한대|∞]] 기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유명하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이후 20년 간을 수학적 문제를 가지고 감정적 싸움을 벌인 일도 있었다. 당시 기록을 검토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홉스는 [[점(기하학)|점]]과 [[선#s-6.2]]이 너비와 넓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수학에는 영 재능이 없어보인다고 한다. 후원자 캐번디시 가문이나 스승 베이컨 그외 친한 지인들이 왕당파라서 홉스도 그런 성향이 있다 여겨졌고, 실제로 정치사상은 그렇게 평가되기도 했다.[* 정확히는 《법의 원리》와 《시민론》에서는 왕당파를 지지했으나, 《리바이어던》에서는 왕당파를 비판한다. 그래서 《법의 원리》를 쓰고 왕당파로 몰려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리바이어던》을 쓰고 나서는 왕당파에게 공격당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바이어던》이 의회파를 지지하는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홉스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군주정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이 영국 내전으로 확대되고 왕당파들이 차례대로 체포되자, 홉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1년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다. 그곳에서 훗날 [[찰스 2세]]가 되는 웨일스 공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1646년 여름, 생제르맹에서 망명 중이던, 훗날 찰스 2세가 되는 웨일스 공의 수학 교사로 취직했다.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 진석용 옮김, 교양인, 2020, p.618)] 집필 활동에 매진했다. 《[[리바이어던]]》도 이 시기의 산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리바이어던》의 급진성[* 홉스는 프랑스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홉스를 증오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리바이어던 전편에 걸쳐 홉스는 로마가톨릭이 진정한 종교와 안정된 정부를 위협하는 두 가지 해악 중 하나라고 몰아붙였다. (또 하나는 장로파였다.) 따라서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출간된 후에는 가톨릭 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보다는 차라리 영국이 더 안전해 보였다. 왕당파의 적으로 찍힌 사람들에게 유럽 대륙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 진석용 옮김, 교양인, 2020, p.356)]으로 인해 같이 망명한 왕당파들이 도리어 홉스에게 살해위협을 가했고, 홉스는 이를 피해 1652년에 다시 [[올리버 크롬웰|크롬웰]]의 의회파가 장악하고 있는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공화정 시기에 홉스는 정치 저술보다는 수학과 과학을 연구하며 지냈다. 크롬웰이 죽고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군주정을 주장한 홉스는 재평가를 받아 찰스 2세와 다시 가까워졌다. 찰스 2세는 홉스에게 나름 좋은 대접을 해줬지만, 홉스는 이 때에도 정적의 비판에 시달려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기존 기독교 교리를 공격하면서 자신만의 유신론[* 홉스는 '유물론에 기반한 유신론'을 펼쳤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질서는 '모든 운동은 물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물질만이 물질을 움직인다'는 사실인데, 성경에서 신(God)과 영(spirit)은 세계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므로, 신과 영도 마찬가지로 물질이라는 것이다.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 진석용 옮김, 교양인, 2020, p.243~244 참조)]을 펼친 바 있는데, 1666년 '무신론과 신성 모독 금지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자, 《리바이어던》에서 썼던 홉스의 논리가 무신론이라는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그 법의 조사 대상자 명단에 홉스의 이름이 올라오자, 홉스는 언제 처형 당할지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비난하는 주교와 목사들에게 비판의 글을 엄청나게 써댔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글은 브럼홀 주교를 비판한 《브럼홀 주교의 '리바이어던 잡기'에 대한 답변 {{{-2 (1668)}}}》이다. 원래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나왔을 때 브럼홀 주교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 《리바이어던 잡기 {{{-2 (1657)}}}》라는 책인데, 홉스는 자신이 무신론자로 몰리자, 11년 전에 나온 이 책을 다시 꺼내와 정성스럽게 재반박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심지어 그러는 와중에도 홉스는 수학자와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명성이 상실되는 것도 두려워해서, 런던 왕립학회의 수학자와 과학자들과 격렬한 다툼을 수십년간 이어나갔다. 홉스의 삶은 평온한 날이 없었으나, 그는 이러는 동시에 명성과 존경을 누렸으며, 70살 무렵에 이르러서는 그의 삶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규칙적인 생활로 삶을 즐기다가 1679년 12월 4일 화요일 뇌졸중으로 인하여 9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령임에도 이웃집 젊은 여성에게 연애감정을 느껴 시를 짓기도 했다고.[* 다만 짝사랑으로 보인다. 시에는 "나는 아직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사람도 있네...(...) 하지만 자랑할 것도 없고 그녀의 환심을 얻을 길도 없네", "아름다운 육체에 깃들어 있는 더 아름다운 정신을 사랑한 사람을.."이라고 쓰여져 있다.] 그는 50살 이전까지 캐번디시 가문의 비서, 가정교사, 자문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에 불과했으나, 50살 중반 《리바이어던》을 지은 이후부터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한 그 명성만큼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홉스의 사상에 조금이라도 호의적 경향을 비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호비스트'라고 낙인찍혔기 때문에 홉스는 일생을 자신을 변호하는 일에 바쳤다. 그러나 그 나머지 시간에 홉스는 무척 평화로웠다.[* 홉스의 일생 중 상당 기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홉스의 가문은 중하류층이었고, 아버지는 홉스가 청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가정을 버렸다. 공포가 끊임없이 홉스를 따라 다녔다. 영국 내전이 발발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0년간 망명길을 떠났다. 망명지 프랑스에서도 프랑스인들과 망명한 영국 성직자들을 두려워했고, 분개한 왕당파의 살해 위협을 피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무신론 혐의를 받아 언제 처형될지 알 수 없었다. 크롬웰 공화국 시기에도 그랬고 왕정 복고 시기에도 그랬다. 홉스는 또한 수학자로서 명성을 상실할까 두려워했고, 이 때문에 왕립학회의 실세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지만.. 요컨대 홉스는 긴긴 세월을 전쟁의 공포 속에서 보냈다. 그 나머지 기간은 평화로웠다.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 진석용 옮김, 교양인, 2020, p.583~58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